
<2025년 퓰리쳐상 소설상 부문 수상작 제임스-문학동네에서 출간 예정>

<작가 퍼시벌 에버렛>

<마크 트웨인 원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책을 읽고 내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 선거에 대한 견해나 내 생각과 의견을 페이스북이나 sns에 올릴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글을 써도 잡혀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나라 말로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
2025년 퓰리쳐상 소설상 수상작 <제임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클베리와 흑인 노예 짐의 모험을 짐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짐은 대쳐 판사의 서재에서 몰래 훔쳐 읽은 책들로 박식하지만, 백인들 앞에서는 무식한 척한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리겠다고 주인이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치면서 잭슨 섬에서 허크와 함께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는 모험 사이사이 미국 헌법을 쓴 존 로크와도 만나고, 볼테르와도 만나서 그가 읽은 것들, 그들이 책 속에 씨부린 내용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서 엄청나게 박식한 단어들로 그들과 논쟁을 벌인다. 물론 꿈에서 깨면 순수한 백인 소년 허크가 "짐, 넌 잠꼬대를 왜케 길게 해? 근데 막 이상한 말을 하더라? 로크가 누구야?" 라고 묻고 짐은 "아녀유 몰러유 지가 뭐라구 씨부렸는감유" 라고 자신의 깨어나고 있는 지성을 감춘다.
퍼시벌 에버렛은 <난 시드니 프와티에가 아니야> 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시드니 프와티에는 아주 얼굴이 하얀 흑인 배우로, 점잖은 흑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흑인이지만 백인화되어 이 정도면 봐 줄 만한, 그런 존재를 상징하는 흑인 캐릭터로 알려져 있는 존재이다.
나도 미국 사람들을 만나면 <넌 일본인이니?> 혹은 <너 서울대 나왔니?> <너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걸 내가 알겠네>같은 질문인지 관찰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최상층 WASP들에게 들어본 적이 있다. (그냥 중산층 백인들은 이런 소릴 안함-이들은 착함). 그러니깐 아시아인이지만 뭐 봐줄만한, 그럭저럭 겸상할 만한 존재..라는 그들 나름의 관대한 표현인 것이다.
한국에서 여자들이 엘리트 남성 앞에서 아는 것이 있어도 '뭐 전 잘 모르겠구요, 알아서들 하세요' 라고 겸손 코스프레를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PECKING ORDER에서 알아서 몇 번째 줄에 서서 처맞을지 지가 알아서 잘 서 있는 것이 궁극의 생존기인것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제임스는 여태 페킹 오더에서 알아서 잘 기고 있다가, 갑자기 마누라와 딸하고 하루아침에 헤어질 수 밖에 없게, 주인이 자기를 멋대로 다른 집에 팔아버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격분하여 도망치기로 한다 . 그는 사실 대쳐 판사의 책들을 다 읽었고 또 다른 노예 영이 주인집에서 훔쳐온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그는 제임스 대신 연필을 도둑질한 노예라고 채찍을 맞았다-나는 왜 이 대목에서 바리사이들에게 고발당해서 채찍을 맞는 예수님이 떠오르나)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백인이 위조했음이 틀림없는 <벤쳐 스미스>라는 흑인이 썼다고 주장하는 아프리카 모험 책의 개구라를 꿰뚫어본 짐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제임스 고라이틀리(Golightly)라 짓는다. 그렇다. 그는 빛을 향해 가는 최초의 흑인 노예인 것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미국 남부 백인들의 개신교 성경을 경멸한다.
연필과 책, 읽기와 쓰기-AI가 등장하면 더이상 학습할 필요가 없다며 뇌를 기계에 위임하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이 책의 전조적 경고를 알아들어야 한다.
읽기와 쓰기, 스스로 깨우치거나 생각하는 능력, capacity를 알아서들 포기하면 노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물질의 노예, 마케팅의 노예, 잘못된 가부장제의 노예, 잘못된 사랑의 노예, 인간을 속박하고 어둠 속에 있게 하는 모든 기만과 거짓 평화와 안온함, 안락함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서 비만해지고 어두워지고 슬퍼지고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어떻게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남에게 맡겨둘 수 있단 말인가?
알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 줄 모르는 인간은 영영 무지몽매한 상태로 남의 스크립트대로 살다 가는 것이다.
이 소설을 꼭 미국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로 읽기보다는, 그냥 도대체 언제까지 남이 써준 각본대로 연기를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도발, 존재적인 의문으로 한국의 젊은이들(누가 우리에게 빚지고 살도록 세뇌하는가)이나 여성들(누가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세뇌하는가) 혹은 머리는 우동 사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모든 성별과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한번쯤 읽어봐야 하는 문제적 소설이다.
이런 어려운 말이 귀찮다면
그냥 퓰리쳐상 소설상 받았으니까, 상빨로라도 한 권 사서 읽어보자.
뭔가 좋으니까 좋은 상 받지 않았겠냐. 한강 책 어려워도 일단 사면 돈 아까워서 세 장이라도 보지 않겠나. 몰라도 자꾸 보려고 노력이라도 하다보면 한 두 문장이라도 남는 것이 있고..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보고 듣고 하다 보면 언젠가는 1센티라도 자기 자신의 스크립트를 쓸 수 있는 지성의 힘이라는 것이 생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James 본문중에서 >

<2025년 퓰리쳐상 소설상 부문 수상작 제임스-문학동네에서 출간 예정>
<작가 퍼시벌 에버렛>
<마크 트웨인 원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책을 읽고 내 생각을 글로 쓸 수 있다는 것, 선거에 대한 견해나 내 생각과 의견을 페이스북이나 sns에 올릴 권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글을 써도 잡혀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나라 말로 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는 것.
2025년 퓰리쳐상 소설상 수상작 <제임스>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주인공 허클베리와 흑인 노예 짐의 모험을 짐의 관점에서 쓴 것이다.
짐은 대쳐 판사의 서재에서 몰래 훔쳐 읽은 책들로 박식하지만, 백인들 앞에서는 무식한 척한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리겠다고 주인이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치면서 잭슨 섬에서 허크와 함께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는 모험 사이사이 미국 헌법을 쓴 존 로크와도 만나고, 볼테르와도 만나서 그가 읽은 것들, 그들이 책 속에 씨부린 내용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서 엄청나게 박식한 단어들로 그들과 논쟁을 벌인다. 물론 꿈에서 깨면 순수한 백인 소년 허크가 "짐, 넌 잠꼬대를 왜케 길게 해? 근데 막 이상한 말을 하더라? 로크가 누구야?" 라고 묻고 짐은 "아녀유 몰러유 지가 뭐라구 씨부렸는감유" 라고 자신의 깨어나고 있는 지성을 감춘다.
퍼시벌 에버렛은 <난 시드니 프와티에가 아니야> 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시드니 프와티에는 아주 얼굴이 하얀 흑인 배우로, 점잖은 흑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흑인이지만 백인화되어 이 정도면 봐 줄 만한, 그런 존재를 상징하는 흑인 캐릭터로 알려져 있는 존재이다.
나도 미국 사람들을 만나면 <넌 일본인이니?> 혹은 <너 서울대 나왔니?> <너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걸 내가 알겠네>같은 질문인지 관찰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최상층 WASP들에게 들어본 적이 있다. (그냥 중산층 백인들은 이런 소릴 안함-이들은 착함). 그러니깐 아시아인이지만 뭐 봐줄만한, 그럭저럭 겸상할 만한 존재..라는 그들 나름의 관대한 표현인 것이다.
한국에서 여자들이 엘리트 남성 앞에서 아는 것이 있어도 '뭐 전 잘 모르겠구요, 알아서들 하세요' 라고 겸손 코스프레를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PECKING ORDER에서 알아서 몇 번째 줄에 서서 처맞을지 지가 알아서 잘 서 있는 것이 궁극의 생존기인것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제임스는 여태 페킹 오더에서 알아서 잘 기고 있다가, 갑자기 마누라와 딸하고 하루아침에 헤어질 수 밖에 없게, 주인이 자기를 멋대로 다른 집에 팔아버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격분하여 도망치기로 한다 . 그는 사실 대쳐 판사의 책들을 다 읽었고 또 다른 노예 영이 주인집에서 훔쳐온 연필 한 자루를 가지고 (그는 제임스 대신 연필을 도둑질한 노예라고 채찍을 맞았다-나는 왜 이 대목에서 바리사이들에게 고발당해서 채찍을 맞는 예수님이 떠오르나)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백인이 위조했음이 틀림없는 <벤쳐 스미스>라는 흑인이 썼다고 주장하는 아프리카 모험 책의 개구라를 꿰뚫어본 짐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제임스 고라이틀리(Golightly)라 짓는다. 그렇다. 그는 빛을 향해 가는 최초의 흑인 노예인 것이다. 하느님이 안 계신 미국 남부 백인들의 개신교 성경을 경멸한다.
연필과 책, 읽기와 쓰기-AI가 등장하면 더이상 학습할 필요가 없다며 뇌를 기계에 위임하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은 이 책의 전조적 경고를 알아들어야 한다.
읽기와 쓰기, 스스로 깨우치거나 생각하는 능력, capacity를 알아서들 포기하면 노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물질의 노예, 마케팅의 노예, 잘못된 가부장제의 노예, 잘못된 사랑의 노예, 인간을 속박하고 어둠 속에 있게 하는 모든 기만과 거짓 평화와 안온함, 안락함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서 비만해지고 어두워지고 슬퍼지고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어떻게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남에게 맡겨둘 수 있단 말인가?
알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쓸 줄 모르는 인간은 영영 무지몽매한 상태로 남의 스크립트대로 살다 가는 것이다.
이 소설을 꼭 미국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로 읽기보다는, 그냥 도대체 언제까지 남이 써준 각본대로 연기를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일종의 철학적 도발, 존재적인 의문으로 한국의 젊은이들(누가 우리에게 빚지고 살도록 세뇌하는가)이나 여성들(누가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세뇌하는가) 혹은 머리는 우동 사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모든 성별과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한번쯤 읽어봐야 하는 문제적 소설이다.
이런 어려운 말이 귀찮다면
그냥 퓰리쳐상 소설상 받았으니까, 상빨로라도 한 권 사서 읽어보자.
뭔가 좋으니까 좋은 상 받지 않았겠냐. 한강 책 어려워도 일단 사면 돈 아까워서 세 장이라도 보지 않겠나. 몰라도 자꾸 보려고 노력이라도 하다보면 한 두 문장이라도 남는 것이 있고..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보고 듣고 하다 보면 언젠가는 1센티라도 자기 자신의 스크립트를 쓸 수 있는 지성의 힘이라는 것이 생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James 본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