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그레이 <우리들 좀 냅둬주세요 FREE TO PLAY >Thesis 2026년 출간예정/천재보고서-필름 출판사 2025년 출간

오징어 게임에서 탈출하는 지능높은 한국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불안세대>,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은 베스트셀러 논픽션 예감

높은 자살율, 이민, 무너진 공교육-문제는 핸드폰이 아니라 놀지 못하게 해온 사회에 있다. 

한국사회를 위한 획기적인 제언=>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 모든 포유 동물들의 새끼는 노는가? 수렵-채집사회와 동물사회의 연구를 통해서 본 인간 발달의 원리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현대 사회는 현상태로 잘못된 공교육이나 과도한 경쟁 시스템을 고치고 창의적인 인재들로 아이들이 클 수 있는 사회로 진화할 수 있는가?

놀 줄 모르는 한국인들과 자살률의 유의미한 상관성 그리고 낮은 출산율은 모두 놀지 못하고 노는 것을 죄악시하는 문화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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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그레이 박사> 




저자는 <불안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와 오랜 동료로 그가 자신의 책 <불안세대>의 초고를 읽어봐달라고 했을 때, 처음부터 그의 주장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그 책은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전문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처음부터 그 책은 이 사회의 부모들이 듣고 싶어하는 가장 빠른 해법, 즉 핸드폰과 소셜미디어라는 공적을 놓고 쓴 책이기에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은 자명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저자는 텅 빈 놀이터를 보며 요즘 우리 사회는 <아이들이 없어진 레이컬 커슨의 침묵의 봄을 경험하고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왜 사람들은 더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가, 그리고 왜 육아는 부모, 선생, 학생 모두에게 고통이 되었는가에 대해 이 모든 것이 인터넷이 발명되고 모든 이들이 온라인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너무 빈약한 근거에 기반한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소아정신병과 청소년 자살률은 1950년에 비해 4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학자들이나 부모들은 이 문제의 원인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핸드폰이나 인터넷 sns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아동 청소년들에게 부모나 어른의 간섭없는 자유로운 자발적인 놀이를 점차로 빼앗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피터 그레이와 많은 인류학자/교육학자들의 의견이다. 칼 그로쓰라는 독일 철학자가 쓴 <왜 어린 동물들은 노는가?>라는 포유동물연구서에서 출발한 저자의 의문은 적어도 1960년대까지 아이들은 부모의 간섭없이 마음껏 뛰놀았고, 1990년대 들어서 미국사회는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며 사커 맘등 이전 세대에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어울려 놀던 것을 모두 보호라는 명목으로 부모가 정해진 커리큘럼에 따른 운동, 커리큘럼에 따른 예체능 활동으로 아이들의 놀 자유를 제한하기 시작했으며, 상업화에 따라 아이들의 창의력마저도 경쟁적으로 체크되는 문화로 바뀌기 시작했고, 미국 아이들의 불안장애, 우울증, 자살률은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 이것은 더욱 심화되어, 오바마가 추구한  커몬 코어라는 정책, 즉 한-중-일 등 아시아권 학습 모델(암기-숙달-고강도 학습)을 공교육에 도입함으로써 이제 유치원생부터 주입식 암기교육을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갈수록 자유롭게 놀수 있는 시간이 더더욱 줄게 되었다. 미국버지니아 대학의 중국출신의 교육학자가 중국 교육과 미국 교육을 비교한 논문에서처럼 <거우판디낭> 즉, 점수만 따는 고학력바보의 대량 양산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윌리엄앤 메리대학의 교육심리학교수인 김경희 교수의 연구결과도 같은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 

현재처럼 아이들의 모든 능력이 선생과 부모의 관찰 및 평가의 대상이 되는 시스템에서는 창의성은 말살되고,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성장 발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비교경쟁의 가름대에 억지로 던져져 있기에 불안, 우울, 자존감의 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시아식 주입식 교육 모델을 도입한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바로 그 아시아 국가들 내에서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목도하고 있으며, 당장 한-중-일의 대학원생들의 성적을 보면 창의적인 인재의 숫자가 현저히 적다는 것이 비교데이터로 나온다. 

더이상 많은 지식을 누가 더 빠른 시간내에 암기하고 있는가, 가 우리 미래사회에 새로이 생겨날 문제들을 해결할 창의적 인재상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에 가장 유망한 인재판별의 기준은 IQ테스트나 멘사 테스트가 아니라 TTCA(토렌츠 창의성 측정)지수, 즉, 얼마나 새로운 문제에 자발적이고 독창적인 문제해결능력을 가졌느냐로 바뀌어야 한다. 저자와 많은 연구자들은 메사추세즈 주의 서드베리밸리 학교라는 대안학교, 그리고 원시 수렵-채집사회의 아동청소년 교육 모델, 말레이시아 바탁 사회의 청소년의 삶 등 <창의적이고 유연하며 행복한 성인>으로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순조롭게 이해한 사회들의 공통점은 5세부터 18세 사이에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자유롭게 놀고 탐색하며, 부모나 선생의 간섭이 제한적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어린 고래들은 자신의 수풀속에서 먹이나 먹는 대신 왜 더 위험한 바다속으로 무리지어 가서 장난치며 또 때로는 싸우며 노는가? 그것이 진화상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선택은 여러 나이대의 동물들이 섞여서 자유롭게 놀며 배우도록 되어 있다. 즉, 컴퓨터 천재는 5살부터 코딩학원에 다님으로써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컴퓨터를 갖고 장난감처럼 오랫동안 놀고 싶어하는 아이를 원하는 만큼 놀게 내버려두어야 나온다. 반대로 많은 영재들이 영재원에 보내지면 몇년내로 망가져서 나오는 이유는 소위 천재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릴 적 누구나 타고났던 창의성을 어떠한 이유로든 성인기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영재들이 자신의 관심사대로 자유롭게 놀도록 내버려두지 못하면 영재도 바보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지 못하면 창의력, 협동능력, 감정표현능력이 극도로 떨어지게 되는 연구 결과를 보아도 자유롭게 노는 것이 인간 본성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놀이터라고 볼 때, 유기적으로 건강하게 돌아가는 사회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 자유롭게 놀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 협력의 규칙을 스스로 익히게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를 관찰하면 얼마나 많은 타협과 절충의 기술을 아이들이 구사하는지 볼 수 있다(ex)내가 이번에 큰 말을 탈게 다음번에 네가 타, 대신 내가 네 보트의 노를 저어줄께 등등) 왜냐하면 계속 같이 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같이 놀 상대가 있어야 하고, 누구나 자신의 욕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놀이터를 떠나고 그만 놀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계속 게임을 하고 싶으면 상대방의 니즈를 맞추고 서로의 욕망을 조정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나 커몬 코어및 경쟁/주입식/성취위주의 교육시스템을 지난 한 세대동안 고수해온 결과 전세계적으로 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며(평생 해온게 공부와 경쟁 뿐이라 인간관계 맺는 스킬이 떨어지고, 실생활능력이 없어서 학교밖으로 나오면 박사학위까지 받았어도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람보다 대사회지능이 떨어짐-따라서 자신감이 없음), 불안하며(한가지 성공의 잣대를 평생 주입당해왔기에 그 가치를 구현하지 못한 스스로를 비하하고 달리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름), 공감능력이 떨어지고(학교/학원에 하루종일 앉아서 학습기계처럼 살았기에 타인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연습이 부족함),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지 못할 경우 극단적인 경우 사회를 거부하거나 게임장을 아예 떠나버리는 (자살)등의 선택을 함. 


저자는 조너선 하이트가 모바일 폰의 가상세계때문에 청소년들이 불안해진 것이 아니라 이렇듯 자연적인 창의성을 교육과 보호라는 미명 하에 억제당했기 때문에 불안/우울/분노등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며 하이트의 주장과는 달리 청소년들이 sns나 핸드폰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유일하게 같은 시간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온라인 공간밖에 없기 때문이며, 오히려 숨막히는 현대의 교육 시스템과 과보호 시스템속에서 그나마 맘대로 자신의 감정을 또래와 실시간 공유하며 놀고, 의견을 나누고, 소셜 플레이를 연습할 수 있고(온라인으로 싸우고 경쟁하고 화해하고 등등 인간관계를 찐으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오히려 온라인밖에 없음), 자신의 창의성을 부모의 관찰이나 간섭없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곳(낙서, 글, 노래, 그림, 춤등을 만들고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은 온라인 공간 뿐이므로 그것마저 막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는 무제한 온라인 라이프를 규제없이 허락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그는 1)조너선 하이트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쓴게 아니고 2)모두가 비싼 대안 사립학교에 가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고 3) 현재의 공교육이 망가져있으므로 모두가 홈스쿨링을 하거나 학교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조너던 하이트의 <불안세대>가 이토록 한국에서 히트한 이유는 한국이 오징어 게임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지난 몇십년간 거대한 사회라는 놀이터에서 일부 힘세고 똑똑하고 많은 장난감을 지닌 일부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만든 놀이 규칙을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예전처럼 정보가 통제되지 않음으로 똑똑해진 아이들은 이제 다른 놀이터로 가버리거나(이민) 게임판 자체를 떠나버리거나(자살, 히키코모리)하는 극단적인 경우들과 함께,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리는 후유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 세대의 게임의 규칙은 이미 너무 낡았거나 대단한 수선을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피터 그레이의 주장은 <사회라는 놀이터에서 강한 자들은 자신의 욕구를 주장하되, 다른 이들의 욕구를 존중하지 않으면 결국 놀이터에는 자신만 남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게임은 강제로 끝나게 된다, 는 사실을 알고 타인을 지배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법을 익혀야 하고, 약자의 경우 강한 아이가 갖고 있는 장난감이나 그의 다른 능력들에 매료되어 있다면 자신의 욕구에 대해 분명한 언어로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평등의 진짜 의미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재력, 능력, 기술, 체력을 소유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재력, 능력, 기술, 체력을 가졌을지라도 모두의 욕구 자체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라는 거대한 놀이터에서 벌어지는 게임은 강제종료될 것이고 그러면서 한국 사회는  더 유연하게 이러한 달라진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 사회의 창의적 인재들에 의해 정복되고 없어질 것이다. 한국사회의 극도의 저출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게임의 룰이 오랫동안 너무나 불공정해서 혹은 너무나 이상해서 더이상 그 게임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국민들의 숫자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사회의 존속과 평화를 위해서라도 한국사회는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누가 만든 규칙에 의해서 우리는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하고 일하고 돈벌고 경쟁해왔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숙고가 필요한 때에 피터 그레이의 책은, 핸드폰사용시간을 제한하거나 극단적으로 아이들을 더욱 사육하는 시스템을 정교화하는 얄팍한 해법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발적으로 노는 가운데 학습하며 그 과정에서 소셜 플레이의 규칙을 스스로 세우고 서로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본래적인 진화의 방향에 맞추어 우리의 사회시스템을 이 책에 나오는 방법들을 서서히 적용하며 또한 더 나은 해법을 찾아가며 변화시켜야 한다고 제언한다. 



나는 학교라면 치를 떨었던 사람으로써 요즘 강아지까지 학교에 보냄으로써 원형탈모를 유발하려고 하는 동네 강아지 주인들과 애엄마 아빠들에게 이 책을 꼭 선물하고 싶다. 

유교의 어떤 부분이 잘못 가르쳐진 결과 공부 자체를 위한 공부, 그리고 교실에 앉아서 하는 공부만 공부라는 잘못된 생각, 그리고 언어인지수리같은 정량화할 수 있는 공부만이 공부라는 잘못된 생각, 그리고 학업성취가 인생의 성취로 연결되는 잘못된 관행때문에...

기안84같은 애들이 앞으론 득세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최근 중개해서 출간된 <천재보고서> (필름 출판사)-이런거를 같이 참고로 놓고 보면 더욱 좋다.